해방투쟁과 제국주의 개입

2011 리비아 민주주의 혁명과 종파주의적 "반제국주의" 실패

미하엘 프뢰브스팅, 2012 가을, www.thecommunist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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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1. 들어가며

 

2. 우리가 반제국주의자인 것은 우리가 노동자계급의 입장을 취하기 때문이다

 

3. 제국주의 세계의 여론이 전쟁에 대한 입장을 정하는 출발점이어서는 된다.

 

4. 다양한 형태의 제국주의 군사 개입에 대해 우리는 어떤 접근법을 취하는가?

 

5. 군사 전술에 미치는 결과들

 

6. 전쟁에서의 모순적 요인들에 대해 맑스주의 고전은 뭐라고 하는가

 

 

7. 리비아 내전과 종파주의적 "반제국주의" 논리

 

8. 카다피 국가의 계급적 성격에 대하여

 

9. 오늘 노동자와 청년은 카다피 독재 하에서보다 나은 입지에 있는가, 아니면 좋은 입지에 있는가?

 

10. 나토는 군사적으로 개입했나?

 

11. 내전에서 도시적 요인과 부족적 요인에 대하여

 

12. "인종주의" 리비아 반군과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계 이주노동자에 대한 공격에 대하여

 

13. 아랍 노동자계급의 연대는 누구에게 갔는가?

 

14. 요약 총괄

 

 

 

[] 아래에서 우리는 제국주의 열강이 개입하는 민주주의 투쟁·민족해방 투쟁의 복잡한 관계망을 다룬 우리의 이전 하나를 다시 발표한다. 소론은 이론적 관점에서뿐만 아니라 역사적 관점에서도 문제를 분석하고 각종 소부르주아 비판에 맞서 맑스주의적 접근법을 방어한다. 글의 후반부에서는 리비아의 민중봉기 과정에서 일어난 구체적인 사건들을, 진정한 맑스주의적 방법을 적용하여 검토하고 있다.

 

소론은 애초 2012 가을에 써서 발표한 글이다. 당연히 그때 이래로 제국주의 열강이 개입하려고 시도한 분쟁과 해방투쟁의 사례들이 많이 있다. (시리아, 우크라이나 ). 우리는 혁명적 맑스주의자가 채택해야 관련 전술을 도출하기 위해, 소론에서 개괄한 것과 동일한 방법을 사용하여 최근 사례들을 분석해서 RCIT기관지 <<혁명적 공산주의 Revolutionary Communism>> 발표하였다. 따라서 여기서는 최근 사례들을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독자들은 이전에 발표한 각각의 성명들을 참조하길 바란다.

 

다만 여기서는 최초의 기사 발표 이래로 리비아의 사건들이 우리의 분석을 완전하게 확인시켜주었다는 점만 추가로 언급하고 넘어가겠다. 알려진 바와 같이, 카다피 정권에 대항하는 민중봉기 당시 카다피를 방어한 저들 가짜 반제국주의자들 실제로는 자신들의 친러·친중 사회제국주의를 반제국주의 간판 뒤에 숨기고 있는 반제국주의자들 나토의 군사 개입이 리비아를 서방의 식민지로 바꿔놓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러한 판타지 소설과는 반대로, 아직 끝나지 않은 리비아의 민주주의 혁명은 미국 대사 살해와 모든 서방 열강 대사관 철수로 이어지며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사건들로, 민족주의·이슬람주의 신념을 가진 경쟁하는 소부르주아· 부르주아 지도부들이 혁명의 완성에 걸림돌로 작용하며 조성해 놓은 난관과 후퇴가 가려지지는 않는다. 계급투쟁의 도상에서 노동자계급을 사회주의혁명으로 이끌 있는 혁명당의 결성만이 이러한 장애물을 제거할 있다.

 

이번에 소론을 일부 영어 편집과 함께 재발표하기로 우리의 결정은 다음과 같은 우리의 확신에 따른 것이다. 여기에서 기술한 분석 방법은 혁명적 맑스주의자들로 하여금 극도로 복잡한 정치적·군사적 상황을 올바로 평가하고, 해방투쟁에 개입하려는 제국주의의 시도에 의해 더욱 찢겨지고 있는 세계에서 정확한 전술을 도출할 있게 해줄 긴요한 자원이 것이라는 확신 말이다.

 

 

 

* * * * *

 

 

 

 

1. 들어가며

 

1929 대공황 이래 자본주의 세계의 가장 경제 위기의 시작으로 2007/08년에 뚜껑이 열린 새로운 역사적인 시기는 정치·군사 무대에서도 깊은 파열과 변화를 가져왔다. 역사적인 시기의 혁명적 성격은 계급 모순의 가속화로 표현되고 있는데,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측면이 2011 초에 시작된 아랍 혁명과 새로운 제국주의 강대국 중국의 부상이다.

 

계급 모순의 이러한 가속화로 노동자계급·피억압자의 지도력 결여 위기는 더욱 첨예화한다. 1948-53 4인터내셔널의 정치적·조직적 붕괴 이후 60 동안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사회주의혁명 세계당이 없다. 따라서 기간 동안 반식민지 나라와 제국주의 나라에서 노동자·피억압자의 수많은 투쟁과 혁명이 소부르주아 지도부에 의해 철저히 오도되었다. 말할 것도 없이 소부르주아 지도부는 정권을 타도하고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수립하는 관심이 없었다.

 

지도력 위기가 새로운 역사적 시기에 특히 두드러지는 이유는, 아랍 혁명의 경우에서처럼 외견상 모순적인 세력배치 관계가 투쟁의 규정적 측면이 되어가고 있어서다. 정당한 민주주의 혁명과 민족해방 투쟁이 또는 제국주의 열강의 개입과 뒤엉키고 있는 것이다. 강대국 미국, EU, 중국, 러시아 격화하고 있는 패권경쟁이 남반구의 수많은 분쟁에 미치는 영향이 커져감에 따라 이러한 현상은 훨씬 두드러지고 있다. 결과, 우리는 새로운 역사적 시기 동안 반식민지 나라들의 민주주의 해방 내전과 민족 방어 전쟁이 제국주의 이해관계·개입·패권경쟁과 이러저런 방식으로 점점 뒤얽힐 것으로 예상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노동자 조직과 활동가들은 해당 전쟁 또는 분쟁을 구체적으로 분석함에 있어 맑스주의적 원칙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기반으로 하는 것이 필수다. 오직 이러한 방식으로만 국제 노동자계급의 이해에 충실한 혁명적 전술을 전개할 있다.

 

예를 들어, 아랍 혁명과 그에 대한 제국주의 개입은 진보운동 대열에 많은 혼동과 혼란을 야기 시켰다. 그러한 많은 운동들이 서방 프로파간다의 압력에 영합하는가 하면, 다른 일부는 카다피 정권과 아사드 정권을 반제 정권으로 미화하며 이러한 반혁명 진영에 합류한다. 우리는 이미 아랍 혁명에 관한 우리의 논설과 책자에서 이러한 입장과 논리를 다룬 있다.[1]

 

이하의 글에서 우리는 분석 전술 도출 임무에 대한 볼셰비키-공산주의적 접근법을 상세히 설명하고, 친정권·반혁명의 자칭 "반제" 진영에 의해 제출된 각종 논리에 비추어 접근법을 옹호하고자 한다. 나아가 구체 사례로서 리비아 혁명과 관련한 여러 주장과 신화를 논박할 것이다.

 

2. 우리가 반제국주의자인 것은 우리가 노동자계급의 입장을 취하기 때문이다

 

제국주의 개입이 수반된, 반식민지 나라의 민주주의·민족 해방투쟁에 대한 RCIT 일반적 접근법을 간략하게 제시하는 것으로 시작하자. 우리는 우리의 강령, <혁명적 공산주의 선언>에서 우리의 방법을 다음과 같이 요약 제시한 있다.

 

특히, 권위주의 정권이나 군부가 민주적 권리를 공공연하게 유린하는 곳에서는 대중운동이 결연히 분기하여 자신의 권리를 위해 싸운다. 다른 국가들은, 그리고 제국주의 강대국들조차도 자신들의 영향력 확대를 위해 이러한 국내 위기를 이용하려 한다. 볼셰비키-공산주의자들은 민주적 권리의 억압에 반대하는 인민대중의 어떤 현실 운동에 대해서도 지지한다. 우리는 반동세력의 어떤 영향력도 거부하며,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반식민지 나라의 민족 자주권을 방어한다. 이는 혁명가들이 혁명적 민주주의 운동 지지를 포기한다는 뜻이 아니다. 현실에서 제국주의 간섭은 결코 혁명적 민주주의 투쟁을 돕는 것이 아닐 뿐더러 오히려 투쟁을 훼손하는 위협일 따름이다. 이것이 우리가 독재에 대항하는 대중의 진보적 해방투쟁을 지지하면서 동시에 제국주의 개입을 날카롭게 거부한 이유다. (예를 들어, 1992-95 보스니아인들의 전쟁, 1999 코소보 알바니아인들의 투쟁, 2011 리비아에서 카다피 독재에 맞선 봉기 ). 제국주의 개입이 정치 정세의 지배적인 특징이 되고 있을 , 오직 때에만, 그리고 때에는 반드시 혁명가들은 민주주의 투쟁을 그러한 개입에 반대하는 싸움에 종속시켜야 한다.[2]

 

이제 접근법을 세부적으로 가다듬어보자. 많은 좌익들은 반제국주의와 국제 노동계급 연대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이해하는 실패하고 있다. 우리가 반제국주자인 것은 다름 아니라 우리가 해방을 열망하는 노동자계급·피억압인민의 투쟁을 해방투쟁의 최대 적이 제국주의다 일관되게 지지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반제국주의는 계급투쟁에 대한 우리의 기본적인 입장에서 나온 결론이지, 계급투쟁 위에 있는 최상위의 원칙이 아니다.

 

바로 때문에 맑스주의자들은 제국주의 · 소부르주아 '여론'과는 완전히 독립적인 국제 노동자계급의 계급 이해에 종속되는 입장에 서게 있는 것이다. 제국주의 · 소부르주아 '여론' 정당한 민족 해방투쟁이나 민주주의 해방투쟁을 지지할 우리가 혼란스러워 하지 않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파블로프의 개와는 달리, 맑스주의자들은 서방 제국주의자들이 찬성 사인을 하는 데서는 어디서나 반사적으로 반대 사인을 하는, 그런 반사적 대립물과 같은 자세를 취하지 않는다. 확고히 우리는 독립적인 계급 입장을 취한다.

 

우리의 방법에 따라, 그러한 정당한 민주주의·민족 해방투쟁 동안 우리는 해방투사들 (주로 부르주아 또는 소부르주아 지도부 하에 있는) 편에 서서 그들의 군사적 승리를 지지한다. 우리는 이러한 진보적 해방투쟁과 제국주의 열강의 이해를 날카롭게 구별한다. 우리는 전자를 지지하는 반면, 후자를 전면 반대한다. 따라서 우리 볼셰비키-공산주의자들은 어떠한 제국주의 개입도 거부하며 제국주의 세력의 패배를 내건다.

 

3. 제국주의 세계의 여론이 전쟁에 대한 입장을 정하는 출발점이어서는 된다!

 

서방의 중도주의 좌익들은 반제국주의의 종파주의적 버전 희화라고 하는 편이 낫겠다 옹호한다. 그들은 해당 투쟁을 총체에서, 모든 다양하고 종종 모순적인 요인들을 포함하는 총체성 속에서 검토하지 않는다. 대신에 그들이 검토, 평가하려 하는 것은 투쟁에 대한 서방 제국주의의 공식 입장이다. 보통 그들은 소위 여론, 부르주아 정치가·관리들과 언론의 언사를 살피는 것으로 대신한다. 그리고 서방 여론이 찬성 사인을 하면 종파주의자는 반대 사인을 한다. 해당 전쟁에서 서방 여론이 싫어하는 진영 쪽에 반사적으로 동조를 보내는 것이다.

 

결과, 종파주의자들은 1991 이라크 전쟁, 1992-95 보스니아 전쟁, 1999 코소바 전쟁, 2001 아프간 전쟁, 2003년에 시작된 이라크 전쟁, 2011 리비아 내전 모든 서로 다른 종류의 전쟁에서 하나의 똑같은 입장에 도달한다. 이러한 접근법은 완전한 오류다. 맑스주의자들에게 제국주의 여론은 고려해야 하나의 요인이긴 하지만, 혁명적 입장을 정하는 데서 출발점도 아니며, 가장 중요한 요인도 아니다! 각종 종파주의자들은 매우 기본적인 진리를 잊어버린 같다! 실패는 자주 그들을 산만한 생각으로 이끌며,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맑스주의자들은 "기회주의자" "제국주의의 압력에 굴복한다" 주장할 빌미를 준다.

 

역사적 유사점을 가지 제시해보자. 러시아 제국주의는 1912/13 발칸 반도에서 자신의 팽창주의적 계급 이익 때문에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슬라브인 민족해방투쟁에 전면적으로 동조적이었다. 그러나 레닌과 볼셰비키는, 혁명가들은 이러한 러시아의 지지 때문에 슬라브인의 민족해방투쟁을 지지하지 말아야 한다고 결론내리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트로츠키와 4 인터내셔널은, 서유럽과 북미에서의 제국주의·소부르주아 여론이 1936-39 스페인의 공화주의 반파시즘 정부에 대해, 또는 1937 이래로 장제스 지도부 중국 근로인민의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민족해방투쟁에 대해 강력히 호의적이었던 사실로부터 어떤 결론에 도달했는가? 어떤 식으로도 트로츠키와 4인터내셔널은 제국주의·소부르주아 여론에 굴복하지 않았고, 반대로 독립적인 국제주의 노동자계급 관점을 기준으로 공화주의 반파시스트 정부나 중국의 투쟁에 대해 비판적인 그러나 무조건적인 지지 입장을 취했다.

 

결코 맑스주의자들은 "서방 제국주의 나라에서 싸우고 있는 혁명가로서 우리가 어떻게 '우리(자국)' 부르주아지의 압력에 가장 반대할 있을까? " 하는 질문으로 시작해서는 된다. 이렇게 하는 것은 일면적이다. 또한 중대한 오류에 문을 열어놓는 것이며 종국에는 "바보들의 반제국주의 퇴보하고 것이다. 반대로, 무엇이 국제 노동자계급·피억압인민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독립적인 입장인가 묻는 것으로 출발해야 한다. , 노동자계급 투쟁과 조직, 의식을 어떻게 강화할 있을까 질문해야 한다. 이것이 계급투쟁 문제들에 접근하는 하나의 정당한 방법이다.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면, 자국 부르주아지에 어떻게 반대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기준으로 사고를 시작해서 끝내는 제국주의 나라의 좌익들 수준으로 급속히 떨어질 것이다.

 

트로츠키는 종파주의적 방법을 논박한 글에서 접근법을 매우 설명했다.

 

" 건의 경우 구십 건의 경우에 실제로 노동자들은 부르주아지가 찬성 사인을 하는 데서 반대 사인을 한다. 그러나 건의 경우에는, 노동자들은 부르주아지와 같은 사인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때는 부르주아지에 대한 불신을 표명하는 자신의 인장을 찍고서 그렇게 한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책은 부르주아지의 정책으로부터 자동으로 도출되는, 그저 부르주아지와 반대되는 사인만 하면 되는 그런 것이 결코 아니다. 이렇게 해도 된다면 종파주의자 누구나 전략가가 것이다. 혁명당은 내외 정세에서 시간 독립적으로 방향을 취하여, 프롤레타리아트의 이익에 가장 부합하는 결정에 도달해야 한다. 준칙은 평화 시기만큼이나 전쟁 시기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3]

 

4. 다양한 형태의 제국주의 군사 개입에 대해 우리는 어떤 접근법을 취하는가?

 

우리는 어떤 점에서 제국주의 군사 개입의 서로 다른 형태들을 이야기할 있는가? 지난 20년간의 가지 예를 제시하는 것으로 점을 예증해보자. 먼저 1991 2003 이라크 전쟁과 20011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있다. 그리고 이와 대조되는 1992-95 보스니아 전쟁, 1999 코소보 전쟁, 2011 리비아 전쟁이 있다. 유형의 전쟁 간의 차이는 무엇이었는가? 아프가니스탄의 경우 탈레반이 확실히 카다피 못지않게 독재적이었음에도 우리가 2001 아프가니스탄을 방어한 반면, 리비아의 경우에 우리는 제국주의 서방이 카다피 정권을 상대로 제한된 군사 작전을 시작한 뒤에도 계속해서 카다피에 대항하는 민주주의 혁명을 지지했다. 여기서 우리의 일관된 접근의 핵심에는 무엇이 있는가? 종파주의자들은 우리가 "제국주의 나라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여론" 굴복했다는 혐의를 건다. 그러나 경우에 제국주의·소부르주아 '여론'에서 정말로 차이가 있었는가? 여론이 카다피보다 탈레반에 대해 적대적이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오히려 반대다. 제국주의 정부들은 모두 카다피와 공개 회담을 하며 이를 널리 홍보했다. 그러다가 카다피가 몰락하려 하자 제국주의 정부들은 사르코지, 베를루스코니, 블레어 등등이 리비아 독재자와 악수하고 농담을 나누고 있는 사진을 정부 공식 웹사이트에서 서둘러 삭제해야만 했다.

 

유형의 전쟁 차이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계급적 관점에서 파악해야 한다. 역사적 유물론자로서 언제나 우리는 먼저 계급세력 관계에서 그러한 분쟁을 바라본다. 보스니아 전쟁은 1992 4 배외주의 세르비아 국가의 억압에 맞서 이제트베고비치 관료 지도부 하에 노동자·농민의 민족해방투쟁으로 시작되었다. 1987년부터 세르비아의 밀로셰비치 정권은 극악한 세르비아 우월주의에 입각한 배외주의 캠페인을 시작했다. 이는 유고슬라비아 거의 모든 민족을 겨냥한 것이었는데 중에서도 특히 코소보-알바니아인을 타겟으로 삼았다. 배외주의 캠페인을 통해 세르비아 관료층은 자본주의 복고 과정 동안에 자신의 지배권을 확고히 하고자 했다. 크로아티아 관료는 크라지나와 슬라보니아의 세르비아 소수민족에 대한 억압을 강화하는 것으로 이러한 움직임에 맞대응하였다. 증대된 민족 억압이 자본주의 복고의 주요 구성부분으로 자리 잡으면서, 자본주의 복고의 사회적 결과들로부터 대중의 주의를 떼어놓는 핵심 수단이 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1991 일련의 발칸 전쟁이 시작되었고, 여기에 제국주의 열강이 개입 기도를 것이다.

 

코소보도 같은 경우다. 코소보는 1993 세르비아 국가에 의해 병합된 이래 세르비아 국가에 의한 유혈 억압과 함께, 그에 이어 발발한 많은 민족해방투쟁들로 가득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가장 최근의 투쟁이 1998 3월에 시작됐다. [4] 2011 리비아 혁명과 시리아 혁명도 부르주아 독재에 대항하는 아랍 혁명의 일부로서, 민주주의 혁명으로 시작되었다. 따라서 종파주의자들의 해석과는 달리, 이들 내전은 제국주의의 사주로 인해서가 아니라 노동자·농민의 진정한 해방투쟁으로 시작한 것이다.

 

1991 · 2003 이라크 전쟁과 2001 아프간 전쟁은 위의 예들과는 달랐다. 2001 아프간에서는 어떠한 진보적인 대중투쟁도 일어나지 않았다. 탈레반에 대항하는 이른바 아흐마드 마수드 연합전선의 지역 내전은 어떠한 진보적 잠재력도 갖지 않았다. 이라크에서 바트당 정권에 맞선 쿠르드 인민의 민족해방투쟁은 정당하고 진보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 이라크 북부에 제한된 투쟁의 지방적 성격을 감안할 정세의 지배적인 요인이 되지는 않았다.

 

이와 관련된 하나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1991 · 2003 이라크 전쟁과 2011 아프간 전쟁은 현재 진행 중인 해방투쟁에 제국주의 개입이 있은 경우가 아니라, 해당 민족을 예속시키는 것을 목표로 노골적인 제국주의 공격이었다.

 

전쟁들은 구체적으로 검토돼야 한다. 예를 들어, 보스니아와 코소보에서 제국주의 전쟁 목표는 세르비아를 정복하여 예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민족해방투쟁의 확산을 억제하고, 그리하여 지역의 불안정을 막는 것이었다. 코소보의 경우, 전쟁 직전인 1997 봄에 알바니아에서 무장 대중봉기가 있었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코소보에서의 성공적인 해방투쟁은 마케도니아와 몬테네그로 피억압 알바니아계 소수민족 속에서 비슷한 해방투쟁을 고무시킬 엄청난 잠재력을 가졌을 것이다.

 

물론 제국주의 개입은 민족해방투쟁의 성격을 바꿔놓을 있다. 그러나 이것이 반드시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아랍 혁명에 관한 책에서 우리는 제국주의 열강이 개입한 군사적 충돌을 예로 들고 있는데, 하나는 1930년대 40년대의 중국 민족해방투쟁이고, 다른 하나는 2 세계대전 동안 나치에 맞선 동유럽의 대규모 게릴라 운동들이다. 예를 들어, 후자의 경우에는 영국이 스탈린주의 티토 파르티잔 부대에게 무기와 장교를 보냈고, 후자의 경우에는 미국이 부르주아 민족주의 장제스 군대를 지원하기 위해 조종사가 딸린 군용기까지 보냈다. 이러한 제국주의 개입 사례들 앞에서 4인터내셔널 혁명가들은 그러한 개입 때문에 이들 투쟁을 지지하길 멈추었는가? 아니다. 그렇게 했다면 그들은 끔찍한 오류를 범한 것이 되었을 것이다!

 

언제나 열쇠는, 주어진 민주주의 또는 민족 해방투쟁이 제국주의 책략에 완전히 종속되고 내적으로 이상 어떠한 유의미한 노동자·농민 해방투쟁 동력도 지니지 않는지 구체적으로 분석하는 것이다. 실제로 그런 경우라면 맑스주의자들은 입장을 바꾸고 해당 해방투쟁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포기해야 한다.

 

그러나 경우에도 계속해서 경계를 늦추지 않고 목전의 역동적 정세를, 전화 잠재력 다시 필요한 입장 변화를 요구할지도 모르는 함께 확인하고 재분석해야 한다. 예를 들어, 1991 3 남부 이라크의 시아파 노동자·농민이 사담 후세인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을 , 우리 맑스주의자들뿐만 아니라 제국주의자들도 봉기의 깊은 계급적 의의를 인식하여, 노동자·농민의 진정한 민주주의 혁명으로 인정했다. 따라서 바트당 군대가 봉기를 진압하는 동안 미군과 제국주의·소부르주아 "여론" 사악한 후세인 정권에 의해 살육당하고 있는 가난한 이라크 인을 위해 악어의 눈물을 흘렸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가만히 기다리다가 봉기가 분쇄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 우리 볼셰비키-공산주의자들은? [5] 우리는 미군에 맞서 이라크 군대를 방어하면서도 동시에 바트당 군대에 맞서 시아파 대중을 방어했다. 경우에 제국주의자들뿐만 아니라 볼셰비키-공산주의자들도 입장을 바꿨는데 이는 일관성을 결여해서가 아니라 투쟁의 성격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정반대도 일어날 있다. 처음에는 맑스주의자가 민주주의 혁명을 지지하다가 나중에 지지를 철회할 수도 있다. 이러한 구체적이고 변증법적인 접근만이 맑스주의자들로 하여금 독립적인 국제주의 노동자계급 입장을 정립할 있게 해준다. 이는 어떻게 노동자계급 투쟁·조직·의식을 끌어올릴지에 항상 초점을 맞추는, 그리고 제국주의·소부르주아 "여론" 휘둘리지 않는 정세판단·전술정립을 확보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역사적 예를 간략히 살펴보자. 1953, 1956, 1968, 1980-81년에 각각 동독,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에서 노동자들이 스탈린주의 관료에 대항하여 봉기했을 맑스주의자들은 어느 입장을 취했어야 했나? 당연히, 서방의 제국주의·소부르주아 "여론" 투쟁들을 전술적으로 이용하여 스탈린주의자들을 약화시키길 희망했기 때문에 입으로는 노동자 봉기들을 찬성했다. 그러나 스탈린주의자들과 스파르타시스트 그룹 같은 살아 있는 트로츠키주의 희화들은 서방 "여론" 때문에 노동자들에 대항하여 관료 독재를 방어해야 한다는 잘못된 결론에 이르렀다. 물론, 진정한 맑스주의자들에게 출발점은 서방의 제국주의·소부르주아 여론 아니라 독립적인 프롤레타리아 계급 이익이다. 따라서 우리는 비판적으로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동유럽의 혁명을 지지했다. 우리는 안타깝게도 패배한 노동자 혁명을 지지하면서도 동시에 동유럽 스탈린주의 정권에 대한 어떤 형태의 제국주의 공격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반대했다.

 

5. 군사 전술에 미치는 결과들

 

그리하여 같은 독립적 국제주의 노동자계급 노선을 실행할 때도, 다른 상황에서는 객관적 요인과 계급 이익으로 인해 매우 다른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같은, 일관된 연속혁명 전략이라도 전쟁의 유형에 따라 전술은 달라진다는 것이다. 기계론적인 바보들만이 이것에 놀란다.

 

노동자계급·피억압자가 직접적인 권력 투쟁에 있지 않은 데서는, 혁명적 정세가 아닌 경우에는, 해당 정권을 타도하는 임무는 제국주의 공격에 대항하여 반식민지 나라 (또는 퇴보 타락한 노동자 국가) 방어하는 임무에 종속된다. 반면, 노동자계급·피억압자가 혁명적 정세, 내전 등에서처럼 직접적인 권력 투쟁으로 동원, 결집해 있을 때는, 볼셰비키-공산주의자들은 계급투쟁의 승리적 결말을 위해 싸운다. 동시에 우리는 이러한 지지를, (타도될 정권에 대한) 일체의 제국주의 공격에 대한 비타협적인 반대와 결합시킨다.

 

2 세계 대전은 군사 전술에 대한 결합(combined) 변증법적 접근법의 적용을 보여주는 그러한 모순적 정세에 대한 모델이다. 전쟁 동안 4 인터내셔널 맑스주의자들은 독일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소련을 방어했다. 소련이 서방 제국주의와 동맹을 맺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동시에 그들은 제국주의 점령자들에 대항하여 식민지 인민들을 들었다. 스탈린주의자들이 · 점령자들을 지지하고 있고, 연합군 제국주의자들이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중국 저항군을 지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또한 4인터내셔널은 유럽에서 독일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민족해방 파르티잔 군대를 들었으며, 제국주의 진영이 서로 충돌하는 데서는 제국주의 진영 모두에 대항하여 패전주의 입장을 취했다.

 

그리하여 소위 단일 전쟁의 맥락 속에서 실제로는 여러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그러한 모순적 정세에서 모든 다양한 전쟁 또는 "하위 전쟁" 대해 동일한 전술을 취하는 것은 틀린데다가 재앙이 것이다. 반대로, 맑스주의자들은 그러한 경우에 복수의 서로 다른 군사 전술을 배치해야 한다.

 

제국주의 군대가 반식민지 나라 (또는 퇴보 타락한 노동자 국가) 정복하고자 위협하고, 동시에 노동자계급이 권력을 잡을 만큼 강하지 않을 때에, 오직 때에만 정권에 대항하는 투쟁을 해당 반식민지 나라 (또는 퇴보 타락한 노동자 국가) 방어하는 투쟁에 종속시키는 것이 필요해진다.

 

바로 이런 이유로 우리는 1992-95 세르비아 관료에 대항하여 보스니아 인민의 민족해방투쟁을 지지하면서 동시에 나토의 공격에 반대했다. 1997-99 코소보 알바니아인의 봉기를 지지하면서 동시에 세르비아에 대한 나토의 전쟁에 반대한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1991 2003 걸프전 동안 우리가"이라크 방어! 제국주의 패배!" 내건 것도 같은 이유다. 2001 10 7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제국주의 공격이 시작됐을 우리는 탈레반 지도부에도 불구하고 아프간 저항군의 군사적 승리를 내걸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스라엘 아파르트헤이트 국가에 대항하여, 2006 레바논의 헤즈볼라 주도 저항투쟁과 2008/09 가자 지구의 하마스 주도 저항투쟁을 방어했다.

 

군사적 충돌에서 이러한 복합적인 상황, 서로 다른 모순적 이해관계들의 혼합 상황은 향후 증가할 공산이 크다. ? 제국주의 열강 간의 증가하는 패권 경쟁 때문이다. 이러한 경쟁 관계로 인해 모든 제국주의 열강은 지역 분쟁과 내전에 개입하여 영향력과 이윤을 증진하기 위해 이를 이용하려는 동기부여를 점점 강하게 받고 있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동향이 많은 종파주의자들에 의해 완전히 무시되고 있다. 이들은 미국, 서유럽, 일본 기존 제국주의 열강 이외에 중국과 러시아 같은 새로 부상하는 제국주의 열강도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실패하고 있다.[6]

 

중국 제국주의에 대한 분석·평가 글에서 우리는 남중국해 (또는 동중국해)에서 가능한 향후 전쟁에 대한 예를 통해 · 제국주의 패권 경쟁 격화로 인해 나올 있는 여러 가능한 결과들을 설명한 있다.

 

"중국 (또는 미국) 동아시아 소국 간의 군사적 충돌에서 노동자계급은 어느 입장을 취해야 하는가? 여기서 우리는, 베트남, 필리핀, 대만 등과 같은 나라는 제국주의 열강이 아니라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나라들은 반식민지 자본주의 나라들이다. (...) 우리의 강령에서 말했듯이 제국주의 열강에 대항하여 이러한 반식민지 나라를 방어하는 것이 맑스주의 원칙이다.

 

그러나 전쟁에 대한 맑스주의 원칙을 선언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실생활에서는 서로 다른 이해관계의 조합과 연합과 혼합의 모든 형태들이 가능하다. 그리고 실로 이것은 계급투쟁의 중요한 측면이다. 올바른 혁명적 전술을 정식화함에 있어 맑스주의자들은 전쟁에 대한 계급적 접근이라는 맑스주의적 원칙의 적용을 전쟁에 대한 특수성과 총체성 속에서 구체적 분석과 결합시켜야 한다.

 

남중국해 (또는 동중국해) 관련하여 이것은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필리핀이나 대만과 같은 나라들은 수십 동안 제국주의와 긴밀한 동맹 관계를 유지해 왔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미국의 반식민지들이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하여, 2012 여름에 거의 일어날 했던 필리핀과 중국 간의 전쟁을 예로 들어보자. 구체적으로 경우에서 필리핀 군대는 미군과의 가장 긴밀한 호응 속에서 행동했다. 이러한 전쟁에서는, 형식상으로는 쪽에 제국주의 강대국 (중국), 다른 쪽에는 반식민지 나라 (필리핀)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필리핀의 경우 전쟁은 대리전이다. 필리핀은 제국주의의 연장선으로서 구실하는 것이다. 따라서 노동자계급은 필리핀 방어가 아니라, 제국주의 전쟁에서처럼 혁명적 패전주의 입장을 취해야 한다.

 

그러나 지역의 모든 전쟁이 반드시 대리전인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베트남 베트남 인민은 해방전쟁에서 일본 제국주의에 이어 프랑스 제국주의를, 그리고 끝으로 제국주의까지 영웅적으로 패퇴시켰다 중국에 의해 괴롭힘을 당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1979 중국 스탈린주의 관료가 제국주의의 협조 하에 베트남 국경을 넘어 침공한 반동적인 공격을 상기해보면 것이다. 원칙적으로 베트남은 중국 못지않게 동해 [중국이 남중국해라고 부르는] 어업권이 있다. 제국주의 중국이 해역을 단독으로 사용코자 내쫓으려는 것에 대한 베트남의 저항은 정당하다. 따라서 볼셰비키-공산주의자들은, 이러한 전쟁에서는 베트남 측에서의 혁명적 방어주의 입장을, 중국과 관련해서는 패전주의 입장을 취할 있다. "[7]

 

6. 전쟁에서의 모순적 요인들에 대해 맑스주의 고전은 뭐라고 하는가

 

역사적으로 제국주의 열강은 민주주의 투쟁을 자신의 목적에 이용하고자 투쟁에 개입해왔다. 이러한 개입에 대해 언제나 맑스주의 세력은 반대해야 한다. 그러나 레닌이 말했듯이, 제국주의가 투쟁에 개입하고 이용하려 한다는 사실로부터 자동으로 맑스주의자가 그러한 민주주의·민족해방 투쟁에 대한 지지를 포기해야 한다는 결론이 성립하지는 않는다. 맑스주의자들이 취할 입장은 민주주의·민족해방 투쟁과 제국주의 정복전쟁 어느 요인이 지배적이 되느냐에 달려 있다.

 

영국과 프랑스는 식민지를 둘러싸고 7 전쟁을 벌였다. , 제국주의 전쟁을 벌인 것이다.(제국주의 전쟁은 고도로 발달한 현대 자본주의를 토대로 해서만큼이나 노예제 또는 시초 단계의 자본주의를 토대로 해서도 가능하다.) 프랑스는 패배하여 식민지 일부를 잃었다. 북아메리카의 여러 주들이 영국 혼자를 상대로 민족해방 전쟁을 시작했다. 그러자 지금의 미국의 일부를 당시 식민지로 보유하고 있던 프랑스와 스페인은 영국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주들과 우호조약을 맺었다. 프랑스와 스페인은 영국에 대한 적개심에서, 자신의 제국주의적 이해에 따라 그렇게 것이다. 프랑스 군대는 아메리카 인들의 편에 서서 영국과 싸웠다. 경우는 제국주의적 상호경쟁이 별로 중요성을 가지지 못하는 보조적 요소로서 작용한 민족해방 전쟁으로서, 1914-16년의 전쟁에서 우리가 보는 (오스트리아-세르비아 전쟁에서 민족적 요소는 제국주의적 상호경쟁이라는 결정적인 요소에 비해 중요성을 가지지 못한다)과는 매우 상반된다. 이것은 제국주의 개념을 판에 박힌 방식으로 적용하여 그로부터 민족전쟁은 불가능하다 결론을 끌어내는 것이 얼마나 불합리한지를 보여준다. 민족해방 전쟁, 예를 들어 하나 또는 이상의 제국주의 강대국에 대항하여 페르시아와 인도와 중국이 동맹하여 벌이는 민족해방 전쟁은 가능할 뿐만 아니라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민족해방 전쟁이 일어날 경우 그것은 이들 나라에서 지금 진행되고 있는 민족해방 운동으로부터 나오는 논리적 귀결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전쟁이 제국주의 열강 간의 제국주의 전쟁으로 전화될 것인가 여부는 대단히 많은 구체적인 요인들에 달려있으며, 이러한 요인들이 틀림없이 등장할 것이라고 장담하는 것은 불합리한 일일 것이다.[8]

 

다른 글에서 레닌은 제국주의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 민족해방 투쟁에 개입하는 것을, 독점자본 분파가 제국주의 나라 내에서 민주주의 투쟁에 개입하는 것과 비교했다. 레닌은 경우 모두 이러한 개입 때문에 투쟁들에 대한 지지를 거부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피억압 민족의 사회주의자들은 특히, 피억압 민족 노동자와 억압 민족 노동자의 완전하고 무조건적인 통일단결을 조직상의 통일단결을 포함하여 옹호하고 실행해야 한다. 이것 없이는 부르주아지 측의 온갖 음모와 배신과 속임수 앞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독립적인 정책과 타국 프롤레타리아트와의 계급적 연대를 옹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피억압 민족의 부르주아지는 노동자들을 속이기 위해 민족해방 슬로건을 집요하게 이용한다. 그들 부르주아지는 그들의 대내 정책에서 지배 민족의 부르주아지와의 반동적 협정을 위해 슬로건들을 사용한다 (예를 들어, 유대인과 우크라이나인에 대한 억압을 위해 반동들과 협정을 맺은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폴란드인 부르주아지). 대외정책에서 그들은 그들의 약탈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라이벌 제국주의 열강 하나와 협정을 맺으려고 쓴다 (발칸 소국들의 정책 등등). 하나의 제국주의 열강에 대항하는 민족해방 투쟁이 어떤 조건 하에서는 하나의 국에 의해 똑같이 제국주의적인 목적을 위해 이용될 수도 있다는 사실 때문에 사회민주주의자가 민족자결권을 인정하길 거부할까? 그런 일이 일어날 하지는 않다. 부르주아지가 정치적 기만과 금전적 약탈을 목적으로 공화주의 슬로건들을 이용하는 수많은 경우들 (예를 들어 라틴 나라들에서처럼) 때문에 사회민주주의자가 자신의 공화주의를 거부하는 일이 일어날 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9]

 

이러한 방법론을, 나중에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옹호하고 발전시켰다. 트로츠키의 비서이자 4 인터내셔널의 지도급 성원이었던 루돌프 클레멘트는 그의 탁월한 논설 <전쟁에서 원칙과 전술>에서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입장을 상세히 설명하며 종파주의적 비판자들에 맞서 입장을 옹호했다.

 

계급투쟁과 전쟁은 국제적 현상으로, 국제적으로 결정된다. 그러나 투쟁이 진영 (블록 블록)만을 허용하므로, 그리고 제국주의적인 싸움이 계급전쟁과 얽혀있으므로 (세계 제국주의 세계 프롤레타리아트), 다면적이고 복잡한 경우들이 발생한다. 반식민지 나라들의 부르주아지나 파시즘에 의해 위협 받는 자유주의 부르주아지는 우호적 제국주의들에게 원조를 호소한다. 소련은 예를 들어 제국주의 진영에 대항하여 다른 진영과 동맹을 맺음으로써 제국주의들 간의 적대를 이용하려 한다. 이로써, 국제적으로 유일한 연대 계급 유일한 진보적 계급 만국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전시에, 특히 새로운 세계대전에서 자국 부르주아지를 겨냥한 혁명적 패전주의를 진보적 전쟁들에 대한 지지와 결합시키는 복잡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클레멘트는 변증법적 접근을 옹호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특히 제국주의 나라들의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외견상 모순적인 상황에서 이들 결합된 임무들 임무들을 이행하는 방법들에 대한 특히 명확한 이해가 요구된다.” 그리고 글의 말미에서 그는 나아가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이와 같이 우리는 각각의 전쟁 상황들이 제국주의 나라들의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그들이 자신에게 그리고 자신의 목표에 충실하게 남아 있고자 한다면 각각의 다른 투쟁 형태를 요구하는 것을 본다. 이것은 도식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혁명적 패전주의의 기본 원칙으로부터 이탈 비칠지도 모르지만, 실제로는 단지 혁명적 패전주의를 특정 진보 진영들에 대한 방어와 결합시킨 결과일 따름이다.”[10]

 

맑스주의 고전이 정립한 구체적, 변증법적 방법이 바로 오늘 우리가 제국주의 패권쟁투 격화 정세 속에서 일어나는 서로 다른 유형의 전쟁들에 적용하는 방법이다.

 

 

 

 

 

 

7. 리비아 내전과 종파주의적 "반제국주의" 논리

 

이하에서는 "반제국주의" 이름으로 2011 리비아 혁명을 비난하는 종파주의적 혼란의 최근 예를 다루고자 한다.

 

RCIT 민중봉기를 지지한 것은 그것이 카다피의 반동 부르주아 독재에 대항하는 민주주의혁명이어서다. 우리가 TNC(과도국가위원회) 부르주아 지도부에 맞서 반군 운동 내에서 싸워야한다고 주장한 것은, TNC NATO 제국주의와 함께 혁명을 억제하고 정권교체로 축소시키려 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노동자·민중 평의회 민병 구성에 의한 혁명의 심화와, 그리고 민주주의 혁명의 사회주의혁명으로 전화를 요구했다. 따라서 우리는 나토의 공격에 단호하게 반대했다.

 

2011 여름, 우리는 우리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따라서 활동가들은 다음과 같은 혁명투쟁의 과제들을 함께 연결하는 것이 중요하다.

 

* 프롤레타리아 권력 장악을 위한 혁명적 강령에 기초하여 카다피 정권에 대항하는 대중투쟁에 참가한다

 

* 압둘잘릴, 알에사비 제브릴 부르주아 반군 지도부에 맞서 봉기 대중 내에서 싸운다.

 

* 노동자·농민·피억압자 평의회 구성.

 

* 독립적인 노동자·민중 민병을 창설하여 부르주아 지도부와는 독립적으로 카다피 정권에 맞선 싸움에 들어간다.

 

* 리비아 반군과의 국제 연대. 카다피 군대와의 싸움을 위한 국제여단과 무기.

 

* 그러나 동시에 NATO 맞서 싸운다! 나토 군대에 패배를! 나토 나라들에서, 그리고 제국주의 세력과 그들의 공범이 기지를 두고 있는 나라들에서 그들의 군사 행동을 방해하고, 나아가 저지하기 위한 노동자운동의 직접행동." [11]

 

그러나 종파주의적 반제국주의자들 민중혁명을 적으로 하여 반동 카다피 정권을 들고 지지했다. 이러한 반동적 입장을 채택한 조직들로는, 예를 들어 공산주의동맹 연락위원회(브라질), 혁명적 맑스주의 그룹(남아공), 사회주의투쟁(영국) [12] , 또는 ICL/스파르타시스트, 노르덴의 국제주의자 그룹/LFI, 또는 스탈린주의 그룹으로 영국공산당(맑스-레닌주의파) 있다.

 

8. 카다피 국가의 계급적 성격에 대하여

 

우리가 리비아 혁명에 관한 지난 기사에서 보여주었듯이, 종파주의자들은 카다피 정권의 계급적 성격을 무시하는 경향을 보였다.[13] 카다피 정권을 그냥 "반제국주의" 성격규정 한다. 가장 기괴한 하나가 게리 힐리 WRP(노동자혁명당) 카다피 "혁명" 찬사다. WRP카다피는 정치적으로 혁명적 사회주의 방향으로 발전했으며, 다른 아랍 지도자들의 궁전과 하렘을 멀리했다. (...) 이런 이유로 그는 논란의 여지 없는 리비아 인민의 지도자가 되었고 그의 이름은 이제 많은 나라 피억압자들의 분투와 동의어가 되었다."[14] 위에 거론한 종파주의 그룹들도 이런 식으로 카다피 정권의 계급적 성격을 오해했다.

 

그러나 우리가 거듭 설명했듯이, 카다피 정권은 국가자본주의, 부르주아 보나파르트주의 독재. 카다피 정권은 다른 여러 반식민지 정권들이 그랬듯이, 거대한 석유자원 덕분에 일정한 기동의 여지를 확보할 있었다.

 

흔히 카다피 국가의 사회적 성취라고 칭송하는 이면에 있는 진실은, 정권이 막대한 석유세입을 리비아 계급 기반 사회의 보존을 위해 외에는 국가 지도자들의 거대한 개인 부의 축적 비대한 보안기구 창설을 위해 사용한 것이다. 통상 기생적인 반식민지 부르주아지가 그러하듯이, 카다피 정권은 수백 조의 오일 달러를 국내 산업을 창출하는 그리고 그와 함께 국내 노동자계급을 창출하는 투입하지 않았다. 그와는 반대로, 정권은 최대한 부를 정권 수뇌부의 축재와 전통적인 부족 구조 보존에 사용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사회의 프롤레타리아 화를 피하고, 예상되는 국내 노동자계급과의 대결을 사전에 차단할 있었다.

 

당연히 카다피의 리비아도 많은 노동자가 필요했다. 정권은 제국주의 부르주아지가 취했던 해법, 초과착취를 위해 수십 동안 산업예비군을 늘리는 해법을 적용했다. 정권은 이주노동자를 수입했다. 사우디, 아랍에미리트 기생적인 걸프 왕정들처럼, 카다피 정권은 최소 682,000명의 이주노동자(2010) 리비아 전체 노동인력 237 명의 29% 차지하는 초과착취 했다! [15] 리비아에 이주노동자가 150 또는 심지어 250 명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하는 통계도 있다.[16] 반식민지 나라들에서 노동자계급이 전체 노동인력의 일부만을 점한다는 ( 전체 노동인력 범주에는 소부르주아지, 봉급 받는 중간계급 등이 포함되므로) 고려한다면, 걸프 국가들처럼 리비아에서도 이주자가 노동자계급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통상적인 통계치보다도 훨씬 크다고 안전하게 가정할 있다.

 

따라서 카다피 정권은 노동자계급의 이주자 부문에 대한 초과착취에 기반했다. 카다피 정권의 "사회주의적" 수사에도 불구하고, 이주노동자들은 노동조합에 가입할 권리가 없었다. "반제국주의자" 카다피는 걸프 지역의 부패한 석유세입 정권들과 동일한 방식으로 이주 노동자들을 초과착취 것이다.

 

카다피 정권을 옹호하는 다른 "진보적" 논거는 1969 카다피 대령이 쿠데타를 통해 권력에 오른 추진한 나라의 근대화다. 근대화 85.5% 도시화 수준이 증언하듯이 의심할 없이 사실이다. 그러나 모든 반동 걸프 왕정들과 전체 중동에 대해서도 이는 사실이다! 리비아의 도시화 수준은 사우디아라비아(82.3%) 요르단(83.4%) 살짝 상회하지만, 레바논(86.3%), 쿠웨이트(98.4%), 바레인(95.9%) 뒤쳐져 있다. 실제로 최근 수십 간의 급속한 도시화는 자본주의적 프롤레타리아화 과정에 의해 추동된 세계적인 현상이지, 결코 특별히 카다피 정권 측의 노력을 증언하는 것은 아니다.[17]

 

종파주의자들이 부여하고 있는, 카다피 정권의 "반제국주의" 신임장에도 불구하고, 리비아는 자본주의 세계경제와 제국주의 질서에 완전히 통합되어 있었다. 리비아 경제는 무역수입의 95 % 연간 GDP 70 % 점하는 석유 수출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완전히 세계시장에 종속된 경제였다.[18]

 

"사회주의" 카다피 정권은 제국주의 세계, 특히 이탈리아에 중요한 외국인투자자 지분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카다피 정권은 이탈리아에서 가장 은행 (유니크레디트) 지분 7% 소유했다. [19] 항공기 무기 회사 핀메카니키와 에너지 회사 에니, 자동차 회사 피아트, 메이저 축구구단 유벤투스 토리노 등의 주식지분도 소유했다. 2010년에 리비아는 133 달러의 유출 FDI 잔고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는 다른 많은 반식민지 나라들보다 높은 수준으로서 리비아 GDP 21% 달하는 것이었다.20

 

나아가, 2000년대 동안 리비아는 서방 제국주의 열강과의 협력을 강화했다. 제국주의 외국인투자에 경제를 개방하고 나서 리비아는 다른 많은 반식민지 나라들보다 많은 외국인투자가 유입됐다. 2010 유입 FDI 잔고는 193 달러로 리비아 GDP (624 달러) 31% 달하는 것이었다.[21]

 

협력에는 몇몇 미국 기업과의 거래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중에는 리비아의 중요한 경제자유구역인 와하 공단에 16.3%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미국 3 석유회사 코노코필립스와의 거래도 있었다. 그밖에 마라톤오일 (16% 지분 보유), 헤스 (8%), 미국 4 석유회사 옥시덴탈 등과의 거래가 여기에 포함되어 있었다.[22]

 

카다피는 제국주의 열강과과 긴밀한 정치적 유대관계를 발전시켰다. 2005, 카다피 정권은 미국의 발의로 구성된 사하라 횡단 대테러 파트너십 가입했다. 여기에는 알제리, 부르키나파소, 리비아, 모로코, 튀니지, 차드, 말리, 모리타니, 니제르, 나이지리아, 세네갈 11 아프리카 "파트너 " 포함되었다. 동맹은 "플린트록"이라는 코드 하에 연례 합동 군사훈련을 조직한다.[23]

 

카다피 정권은 리비아를 통해 유럽으로 가는 이주자들의 유입을 금지시키겠다고 EU 약속했다. 2010 10, "반제" 지도자는EU로부터 5천만 유로를 받고, 유럽으로 가는 불법 이주자 유입에 대처하기 위한 협정에 서명했다.[24] CIA 카다피와 비즈니스를 있겠다고 느꼈는지 "테러 용의자" 고문에 카다피와 협력했다![25]

 

서방 제국주의와의 모든 협력과 더불어 리비아 인민의 가장 경미한 저항에 대해서조차도 싹을 잘라버리겠다는 식의 살인적인 억압도 더해갔다. 종파주의자들의 칭송에도 불구하고 카다피 정권은 그에 맞서 노동자·민중이 봉기에 나서야 이유가 차고 넘치는 유혈 부르주아 독재였다!

 

카다피는 확실히 이들 종파주의적 "반제국주의자"보다 자신의 계급 입장을 이해했다. 튀니지에서 노동자·빈민이 알리 독재에 맞서 거리로 나섰을 , 카다피는 그들에게 강의했다. 카다피는 공공연하게 알리와의 연대를 표명하며, 알리를 타도했다고 튀니지 인민을 공격했다. 뉴스통신 일렉트로닉 인티파다는 카다피가 연설에 대한 보도를 냈다.

 

카다피는 자신이 지네 (ZINE)라는 호칭으로 부르는 알리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돌아섰다. 나는 보르기바 [튀니지 독립 초대 대통령] 지네 말고는 아는 사람이 없지만, 나에게 지네는 튀지지에 최선인 인물입니다. 그는 튀니지에 [경제성장의 견지에서] 자부심을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이 그를 좋아하든 않든, 그에게 반대하든 않든 나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진실을 말할 뿐입니다. 내가 이런 한다고 지네가 나에게 돈이나 영예나 무슨 보상을 준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그는 나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지만, 나는 여러분에게 진실을 말합니다. 나는 보통 아랍 대중에게 솔직하게 대하며 그들에게 진실을 지적해줍니다. 현재 지네보다 나은 사람은 없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지네가 2014년까지만 권좌에 있는 [ 알리가 사우디아라비아로 도피하기 전에 번째이자 마지막 연설에서 양보/약속 하나] 아니라, 그가 종신으로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지네와 가까운 누군가든 부패했거나 지네 자신이 부패했다면 그들은 재판정에 서야 것입니다. 증거를 가져와서 그들을 심문해 보세요. 통상 이것이 정상적인 관행입니다. 그러나 부패가 있을 때마다 우리가 나라를 불태우고 밤에 아이들을 죽이는 것은 인정할 없습니다. 신이시여 튀니지에 평화를 주소서.'[26]

 

카다피 정권과 미국/EU 제국주의 사이에 거듭 충돌이 있은 것은 사실이다. 1986 미국 대통령 레이건이 트리폴리를 폭격했을 우리는 무조건 리비아를 방어했다. 그러나 우리가 2011 여름에 말했듯이, 이것이 카다피 정권의 부르주아계급적 성격을 바꾸진 않는다. "카다피 정권은 언제나 국가자본주의 관료 독재였다. 반식민지 세계의 다른 여러 정권과 마찬가지로 카다피 정권도 일시적으로 주요 제국주의 열강들과 충돌했다. 그러나 이것이 정권의 부르주아 성격을 바꾸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아프가니스탄에서 서방과 탈레반 정권 간의 전쟁으로, 이라크에서 서방과 사담 후세인 독재 간의 전쟁으로 이들 정권의 자본가계급 성격에서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27]

 

9. 오늘 노동자와 청년은 카다피 독재 하에서보다 나은 입지에 있는가, 아니면 좋은 입지에 있는가?

 

종파주의적 "반제국주의자들", 리비아에서 반혁명 나토 제국주의와 대리인인 이른바 인종주의 반군 내전에서 승리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들은 노동자계급의 패배로 간주한다.

 

반면 우리는 리비아 혁명이 부르주아-보나파르트주의 카다피 정권을 패퇴시켰기 때문에 노동자계급·피억압자의 부분적인 승리로 끝났다고 주장한다. TNC 중심으로 부르주아, 친제국주의 지도부는 미완성 민주주의 혁명의 성과를 가로채고 혁명을 민주주의 반혁명으로 전환시키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민주주의 반혁명 전환 과정은 저들 뜻대로 완료되지 못하고 있을뿐더러 완료와는 거리가 한참 상황이다. 카다피 이후 오늘 리비아는 각종 파벌로 분할된, 위기로 점철된 체제다. 나라가 분할된 것은 권력 투쟁에 의한 것일 뿐만 아니라 대중의 압력에 의한 그리고 많은 부분 대중의 압력으로 인한 것이기도 하다. 오늘 리비아에서 존재하는 것은 부분적인 이중권력 상황이다. 부분적인 이중권력 상황 구성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1) 125 명에서 20 명이 (인구가 5~6백만 명인 나라에서!) 어떠한 중앙 통제도 받지 않는 60 개의 무장 민병대로 조직되어 있다.[28]

 

2) 대중이 시위와 파업 (지역에 국한된 총파업을 포함하여), 폭동, 무장행동을 통해 정권의 다양한 혐오 인물들을 거듭 권좌에서 끌어내렸다.

 

3) 노동자들이 새로운 노동조합을 결성했고, 스스로를 평조합원 구조로 조직하고 있다. 노동자들이 카다피 정권 하에서보다 많은 권리와 현장권력을 가지고 있다.

 

국가기구는, 산산조각 나고 쇠약해지긴 했지만, 한편으론 TNC 지도자들을 카다피 정권의 잔당과 하나로 묶어서 스스로를 재건하려는 시도를 반복해서 하고 있다. ( "반제" 정권이 얼마나 반동적이었는지 보여주는!). 그러나 무장 민병대는 반복해서 정권의 주요 인물들을 공격했다. 예를 들어 올해 5 8, 200명의 민병대원들이 트리폴리의 총리 관저에 대전차포를 발사하여 알케이브 총리가 도망쳐 피신하지 않으면 되었다. 번번이 민병대원들은 거리에서 항의시위 하는 노동자·청년들을 들었다. 이것은 노동자·피억압자가 정권에 맞서 그들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데서 오늘, 카다피 정권 하에서보다 많은 기회가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혁명의 영웅적인 중심지이자 가장 중요한 산업 도시 하나인 미스라타에서 노동자와 민병대는 빵과 양질의 보건의료 시스템을 위해, 인플레이션에 맞서, 우리의 싸움을 가로채려는 자들, TNC 맞서 3일간의 총파업을 벌였다. 파업 중에 그들은 현지 TNC본부를 파괴했다. 미스라타를 비롯한 밖의 도시들의 거리에는 담벼락에 반제국주의 슬로건을 있다. "오늘은 리비아에서, 내일은 월스트리트에서!". 독립 노조연맹이 결성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벵가지에서는 많은 파업이 있었다. 벵가지에서 청년 조직들은 정부와 카다피 정권 관리들에 항의하여 거듭 시위를 벌이고 있다. 올해 1, 시위로 인해 TNC 대변인 압둘 하피즈 고가가 사임해야 했다.

 

미스라타와 트리폴리에서 항만 노동자들과 유전 노동자들은 평조합원 평의회로 조직화를 이루며, 혁명의 계속과 모든 카다피 경영진과 관리자들의 퇴출을 요구하고 있다. 많은 노동자 파업이 벵가지로부터 보고되고 있다.[29]

 

리비아 혁명의 다른 긍정적인 결과는 아자와드 공화국을 세운 말리의 투아레그족 민족해방투쟁의 진전이다. 지금 성취가 이슬람주의 운동 안사르 디네에 의해 위협 받고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30]. 다시 말하지만, 이는 리비아에서 민주주의 혁명의 (부분적인) 승리가 피억압 인민에게 득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종파주의적 "반제국주의자들"과는 반대로, 우리는 노동자계급·피억압자가 그들의 권리와 혁명의 지속을 위해 싸우는 있어 카다피 독재 하에서보다 오늘 나은 입지에 있다고 주장한다. 혁명의 미완성된 성격과 실로 혁명의 부르주아화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물론 노동자계급이 지도력 (리더십)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면 모든 것은 바뀔 있고 실제로 바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에도 해당되며, 미완성 혁명이 있었던 세계 모든 나라에도 해당된다. 지도력 위기를 극복하는 것이 사활적인지에 대한 이유다.

 

그러나 혁명과 혁명의 지도부 (리더십) 구분하지 못하고 혼동한다면, 혁명의 잘못된 지도부 때문에 반혁명에 합류한다면, 지도력 위기 극복은 실현될 없다. 혁명적 대중에 결합하여 대열 내에서 부르주아 지도부와 싸우는 것에 의해서만 실현될 있다.

 

명백히 혁명적 대중은 구정권을 다시 불러오길 원하지 않고, 리비아 아랍 사회주의 인민 자마히리야국 의탁하길 바라지도 않는다는 사실도 드러나고 있다. 카다피와 관련된 일부 부족을 제외하고, 대중은 여전히 카다피에 대한 증오를 떨치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 리비아에서 계급투쟁의 주요 모순선은 대중과 반군 사이가 아니라, 한편에 반군 인민대중 조직된 민병대와 다른 한편에 TNC 신정권 사이에 있다.

 

10. 나토는 군사적으로 개입했나?

 

그러나 종파주의적 "반제국주의자들" 나토가 자신의 영향력에 걸림돌인 카다피 정권을 제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리비아에 군사적으로 개입했겠냐고 반문한다. 답변한다. 첫째, 나토의 군사 개입이 사전에 오래 계획된 것이 아니라 급조된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위에서 기술했듯이, 불과 전까지만 하더라도 제국주의자들은 카다피와 비즈니스를 진행하며 악수하고 있었다. 나토의 개입은 2 17 봉기에 대한 카다피의 유혈 탄압으로 인한 혁명 리비아의 경우 급속히 군사화 혁명 광범위한 확산에 대한 급조된 반응이었다.

 

그때까지 아랍 혁명은 상대적으로 평화적이었고, 따라서 제국주의 열강이 새로운 지배자 (특히 무슬림형제단과 같은 이슬람주의자들) 일정한 협약에 이를 가능성을 열어둔 상태였다. 그러나 리비아 내전의 시작이 전체 시나리오를 변경시켜 아랍 혁명을 무장 지역 [중동 지역] 봉기로 전화시킬 기세를 보였다. 이는 무엇보다도 제국주의자들의 석유자원에 대한 안전한 접근을 위태롭게 하고, 이스라엘의 종말을 뜻하는 것이 수도 있었다. 따라서 제국주의자들은 리비아 혁명을 저지하고 리더십을 정치적으로 전유(專有)하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11. 내전에서 도시적 요인과 부족적 요인에 대하여

 

종파주의적 "반제국주의자들" 내놓은 다른 논리는 반군이 후진적인 리비아 동부 지역에 뿌리를 두고 있고, 지역은 배외주의와 알카에다가 매우 강한 지역이라는 것이다. 보다 현대적인 리비아 서부는 진보적 전통이 강한데 여기는 카다피 성향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부족적 유대는 리비아 동부 지역에서뿐만 아니라 카다피 정권에게도 중요했다. 카다피가 트리폴리 함락 어디로 도망쳤는지 상기해보면 것이다. 시르테에 있는 그의 부족에게로 피신했다! 트리폴리가 리비아의 정식 수도지만, 카다피는 정부부처 대부분을 시르테로 옮겼다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정권은 있는 최대한으로 후진적인 부족 사회를 보존했다.

 

나아가 혁명의 중심이 어디에 있었는지 구체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2011 3 초에, 아직 나토 폭탄이 발도 떨어지기 전인 시점에, 리비아 노동자·민중은 7 도시 가운데 5 도시 (벵가지, 미스라타, 바이다, 자위야, 아즈다비야)에서 권력을 잡았다. 트리폴리에서는 217 이후 며칠간 대규모 봉기가 일어나 정부청사 여러 채가 불탔다. 그러나 거기에는 무장 국가기구가 고도로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봉기는 잔인하게 분쇄 당했다. 이것으로 혁명이 매우 도시적인 사건이었고 도시 인민대중 다수의 지지를 받았다는 것이 분명하다. 이때는 카다피 집회는 전혀 없었거나, 아주 소규모의 것들뿐이었다. 리비아 혁명의 승리는 나토의 개입 때문이 아니라 대중 지지에 기인한 것이었다.

 

12. "인종주의" 리비아 반군과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계 이주노동자에 대한 공격에 대하여

 

종파주의적 "반제국주의자들" 하나 주요 논거는 이주노동자들 그리고 특히 흑인 이주자들 "인종주의적" 리비아 반군에 의해 리비아에서 추방되었다는 주장이다. 리비아에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계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피부색을 이유로 공격이 있은 것은 확실히 사실이다. 그러나 종파주의적 "반제국주의자들" 전체 그림을 완전히 왜곡한다.

 

첫째,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계 이주자들이 따로 지목돼 리비아에서 추방된 것이 반군의 인종주의적 태도 때문이었던 것처럼 인상을 주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진실은 대부분의 이주노동자 가운데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인은 단지 소수일 이었다 (최대 집단은 이집트 출신 이주노동자들이었다) 리비아를 떠났다는 것이다. 떠났는가? 다름 아니라 내전 때문이다. 전쟁의 결과로 석유 생산과 경제 전체가 붕괴되었고, 이주노동자들은 임금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에 내전으로 인한 엄청난 불안감이 더해져 2011 2월과 6 사이에 50 명의 이주자가 리비아를 떠났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계 이주노동자들 뿐만 아니라 아랍계 이주노동자들도 리비아를 떠났다는 사실은, 인종주의가 아니라 전쟁 상황이 이주노동자 대량탈주의 주된 이유임을 말해주는 분명한 증거다.

 

둘째,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인에 대한 배외주의적 감정이 마구 퍼진 것은, 이들을 카다피가 그의 보안군 복무 용병으로 수입해 상황을 감안할 놀라운 일이 아니다.

 

셋째, 2011 2 이전에도 카다피 정권 자신에 의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인에 대한 인종차별과 잔인한 처사에 관한 많은 보도가 떠돌고 있다! 종파주의적 "반제국주의자들" 반군에 의한 배외주의에만 초점을 맞추고 카다피의 군경이 이용한 배외주의는 무시하는가? 리비아 반군이 실제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계 이주자들을 표적으로 삼았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카다피 정권 자신이 이들을 표적으로 삼고 조직적으로 추방한 것은 전혀 논란의 여지가 없는 사실임을 감안할 이것은 특히 부조리하다. 카다피 정권은 2000년부터 조직적으로 난민들을 추방한 것으로 알려졌다. 카다피에 우호적인 중국 웹사이트에 따르면, 수만 명의 나이지리아인, 가나인, 차드인과, 그보다 많은 니제르, 감비아, 수단 출신 사람들이 추방되었다[32] 하여 어떤 해석의 여지도 남기지 않고 있다. 예를 들어, 2008 1, 카다피 자신이 모든 불법 난민을 추방하겠다는 의사를 공식적으로 밝혔다. "당국은 불법으로 리비아에 거주하는 모든 외국인을 모아내 추방하는 작업을 즉시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33] 그리고 모든 것은 유럽 제국주의와 공공연히 협력하는 속에서 행해졌다. 유럽 제국주의와 카다피는 아프리카 난민으로부터 유럽 제국주의의 국경을 "보호"하기 위한 협정에 서명했다. 이와 같이 카다피야말로 제국주의의 대리인이었다. 그리고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계 이주자들을 인종주의 표적으로 삼은 것도 다름 아닌 카다피였다!

 

따라서 리비아 반군이 조직적으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계 이주자들을 표적으로 삼아 추방했다는 견해를 우리가 설사 받아들이더라도, 종파주의자들이 부끄럽게도 방어한 "반제국주의" 카다피 정권보다 반군이 인종주의적이라는 주장까지 인정될 여지는 어디에도 없다.

 

13. 아랍 노동자계급의 연대는 누구에게 갔는가?

 

끝으로, 중동의 인민대중도 리비아 내전에서 어느 진영이 그들의 계급적 이해에 가까운지 종파주의적 반제국주의자들보다 이해했다. 아랍 세계 전역에서 대중이 리비아 혁명에 연대하여 시위한 것이 점을 보여준다. 반면 시리아 국영언론 보도는 제쳐두고 어디에서 카다피 정권에 대한 대중의 지지 행동이 있었나?! 튀니지 노동조합 연맹 UGTT PCOT (노동자공산당) 같은 노동계급 조직들이 리비아 혁명에 연대를 표명한 것은 부인할 없는 사실이다. 오늘 그들이 여전히 시리아 혁명에 계속해서 연대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대중 지지의 증거는 "리비아 반군의 인종주의적 학살 관한 어느 음모론이나 잔혹 스토리보다도 백배는 설득력 있다!

 

14. 요약 총괄

 

글에서 우리는, 제국주의 열강이 개입하려 하는 전쟁과 봉기에 대한 맑스주의적 접근법은 종파주의적 "반제국주의자들" 태도와는 아주 많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종파주의적 반제국주의자들 자국의 부르주아지가 찬성 사인을 하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기계적으로 반대 사인을 하는 반해 맑스주의자들은 이러한 전쟁과 봉기를 국제주의적이고 독립적인 노동자계급 관점에서 접근한다. 우리는 노동자계급의 투쟁·조직·의식의 전진에 유리한 봉기와 내전을 지지한다. 우리는 그들의 승리가 노동자계급 투쟁에 직접적인 위협이 되는 세력에 반대하여 싸운다. 같은 이유로 우리는 모든 형태의 제국주의 공격에 반대하는데, 왜냐하면 제국주의가 강화되는 것은 언제나 노동자계급에게 해악으로 오기 때문이다.

 

진정한 맑스주의적 관점은 군사 전술에 대한 결합(combined) 변증법적 접근방식의 적용을 필히 포함한다. 2 세계대전에서 4인터내셔널이 방어주의 전술과 패전주의 전술을 결합시켰을 때가 그러한 경우다. 이러한 결합된, 이중 군사 전술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어야 하며, 아마도 미래에는 더욱 적용되어야 것이다. 증대되고 있는 제국주의 패권 경쟁 특히 신흥 중국 제국주의의 부상을 고려한다면 감안할 , 우리는 제국주의 세력이 반식민지 세계의 내전에 개입해서 이용하려는 사례를 점점 많이 보게 것이다.

 

2011 리비아의 미완성 민주주의 혁명이 예다. 볼셰비키-공산주의자들이 민중봉기를 지지한 것은 그것이 카다피의 반동 부르주아 독재에 대항하는 정당한 해방투쟁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혁명을 억제하고 정권교체로 축소시키려 나토 제국주의와 함께 TNC 부르주아 지도부에 맞서 반군 운동 내에서 싸울 것을 주장했다. 우리는 노동자·민중 평의회와 민병 결성으로 혁명을 심화시키고 민주주의 혁명을 사회주의혁명으로 전화시킬 것을 요구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나토의 공격에 대항하여 싸웠다. 나토의 공격은 혁명을 저지하는 도움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종파주의적 "반제국주의자들" 카다피 정권 편들기 논리는 전적으로 틀렸다. 그들은 노동자계급의 악랄한 적인 카다피 정권의 부르주아적·친제국주의적 성격을 총체적으로 무시했다. 시점에서 내전의 결과물은 미완성 민주주의 혁명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미완성 민주 혁명은 독재를 제거하는 성공했고, 따라서 오늘 노동자계급·피억압자는 스스로 조직하고 무장하여 자신의 권리를 위해 싸울 있는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은 성공적인 사회주의 혁명으로 이끌 있는 혁명적 노동자당을 보유하고 있지 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지금까지 내국 부르주아지와 제국주의자들은 혁명을 저지하는 , 노동자계급이 권력을 잡는 것을 막는 성공했다. 새로운 인터내셔널 (사회주의혁명 세계당) 일부로 이러한 혁명적 노동자당을 건설하는 과제는 리비아와 세계의 혁명가들에게 여전히 중요한 임무로 남아 있다. RCIT 임무 달성을 위해 전력을 바치고 있다.

 

 

 

 

 

[1] 미하엘 프뢰브스팅이 책은 독일어로 출간되었지만, 리비아 내전에 관한 장은 영어로 번역되어 RCIT 기관지 <<혁명적 공산주의 (Revolutionary Communism)>> 1호에 실려 있다. 영어본은 다음의 우리 웹사이트에서도 있다. www.thecommunists.net/worldwide/africa/libya-revolutionary-tactics

 

[2] RCIT: The Revolutionary Communist Manifesto, pp. 45-46, www.thecommunists.net/rcit-manifesto/revolutionary-struggle-for-democracy

 

[3] Leon Trotsky: Learn to Think: A Friendly Suggestion to Certain Ultra-Leftists (1938); in: Trotsky Writings 1937-38, p. 332f. (강조는 원저자). RCIT 전문을Revolutionary Communism No. 5 (2012) 재발표했다.

 

[4] 1980년대 말과 1990년대에 우리는 유고슬라비아와 발칸 전쟁의 역사에 관한 많은 분석적·강령적 자료를 소책자 권을 포함하여 독일어로, 그리고 몇몇 자료는 세르비아-크로아티아어로 발간했다. 자료들 사본을 받길 바라는 분은 우리에게 연락하면 된다.

 

[5] 당시에 우리는 우리 전임 조직인 5 인터내셔널 동맹 (LFI) 일부였다. RCIT 창립 성원 다수는 LFI 지도급 성원들이었다. LFI 다수파가 중도주의로 타락하는 과정에서 동지들이 2011 조직에서 제명되었거나 탈퇴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을 보라. “Where is the LFI drifting? A Letter from the RCIT to the LFI comrades”; in: Revolutionary Communism No. 3, June 2012, www.thecommunists.net/theory/centrist-degeneration-of-lfi

 

[6] 다음을 보라. Michael Pröbsting: China‘s transformation into an imperialist power. A study of the economic, political and military aspects of China as a Great Power; in: Revolutionary Communism No. 4 (August 2012), p. 4-32, online: www.thecommunists.net/theory/why-china-is-imperialist

 

[7] 다음을 보라. Michael Pröbsting: China‘s transformation into an imperialist power. A study of the economic, political and military aspects of China as a Great Power; in: Revolutionary Communism No. 4 (August 2012), p. 22-24, online: www.thecommunists.net/theory/why-china-is-imperialist

 

[8] V. I. Lenin: The Junius Pamphlet(1916); in: CW 22, p. 310-11. [<유니우스 팸플릿에 대하여>, 한국어판 레닌전집 64, <<맑시즘의 희화와 제국주의적 경제주의>>, 양효식 옮김, 아고라, 19-20]

 

[9] V. I. Lenin: The Socialist Revolution and the Right of Nations to Self-Determination (1916); in: CW 22, p. 148

 

[10] Rudolf Klement: Principles and Tactics in War (1938); in The New International (Theoretical journal of the Socialist Workers Party, US-American section of the Fourth International), May 1938, Vol. 4, No. 5, pp. 144-145. RCIT 전문을 다음 잡지에 재발표했다. Revolutionary Communism No. 4 (2012), pp. 44-46.

 

[11] Michael Pröbsting: The intervention of the imperialist powers in Libya, the struggle of the masses against Gaddafi’s dictatorship and the tactics of revolutionary communists”; in: Revolutionary Communism No. 1, September 2011, www.thecommunists.net/worldwide/africa/libya-revolutionary-tactics

 

[12] For the unconditional defence of Libya against Imperialism! For a Military United Front with Gaddafi to defeat NATO and the CIA armed "rebels"! No confidence in the government of Tripoli; only by arming all the people and by the permanent revolution can we win the struggle! Statement on Libya by the Liga Comunista of Brazil, the Revolutionary Marxist Group of South Africa and Socialist Fight of Britain, 21 April 2011; in: Socialist Fight No. 6 (2011), p. 36

 

[13] Michael Pröbsting: The intervention of the imperialist powers in Libya, the struggle of the masses against Gaddafi’s dictatorship and the tactics of revolutionary communists”; in: Revolutionary Communism No. 1, September 2011, www.thecommunists.net/worldwide/africa/libya-revolutionary-tactics

 

[14] Statement of the WRP Political Committee, 11th December 1981, published in News Line, 12th December 1981

 

[15] 다음을 보라. International Organization for Migration: World Migration Report 2010. The Future of Migration: Building Capacities for Change (2010), p. 135; UNCTAD: Handbook of Statistics 2010, p. 468

 

[16] 다음을 보라. International Federation of Human Rights (FIDH): Exiles From Libya Flee To Egypt (2011), p. 4

 

[17] UNCTAD: Handbook of Statistics 2010, pp. 468-476

 

[18] African Economic Outlook 2012, Libya 2012, p. 4

 

[19] Antonio De Bonis: Italy and the Libyan crisis, 5.4.2011, http://www.antoniodebonis.com/2011/04/italy-and-libyan-crisis.html

 

[20] World Investment Report 2011, p. 191; World Bank: World Development Report 2012, p. 398

 

[21] World Investment Report 2011, p. 191; World Bank: World Development Report 2012, p. 398

 

[22] Reuters: Factbox: U.S. oil companies' interests in Libya, 22.2.2011, http://www.reuters.com/article/2011/02/22/us-libya-usa-oilcompanies-idUSTRE71L5Y820110222

 

[23] U.S. Africa Command: The Trans-Sahara Counterterrorism Partnership, http://www.africom.mil/tsctp.asp

 

[24] Bjarte Vandvik: The EU's dubious refugee deal The EU is paying Libya to deal with refugees seeking a new life in Europe. Can we trust Gaddafi's regime to look after them? The Guardian, 20 October 2010 http://www.guardian.co.uk/commentisfree/2010/oct/20/eu-refugee-libya-gaddafi

 

[25] Ben Hubbard: Libya: CIA Reportedly Worked Closely With Gaddafi Intelligence Services, The Associated Press, 09/03/11 http://www.huffingtonpost.com/2011/09/03/libya-cia-gaddafi-intelligence_n_947764.html

 

[26] 다음에서 인용. Nouri Gana: Libya’s tragedy, Gaddafi’s farce, The Electronic Intifada, 22.2.2011, http://electronicintifada.net/content/libyas-tragedy-gaddafis-farce/9814

 

[27] Michael Pröbsting: The intervention of the imperialist powers in Libya, the struggle of the masses against Gaddafi’s dictatorship and the tactics of revolutionary communists”; in: Revolutionary Communism No. 1, September 2011, www.thecommunists.net/worldwide/africa/libya-revolutionary-tactics

 

[28] International Crisis Group: Holding Libya Together: Security Challenges after Qadhafi (December 2011), p. 30

 

[29] 그러한 많은 보도를 다음의 리비아 청년운동 웹사이트에서 발견할 있다. http://www.shabablibya.org. 혁명적 민병대들과 항만 노동자 총회로부터 나온 많은 보고들을 게재하고 있는 중도파 트로츠키주의 FLTI 웹사이트에서도 발견할 있다. http://libyarevolutionupdate.blogspot.com.ar/

 

[30] 이에 대해서는 우리의 다음 기사를 보라. “For a free and socialist Azawad! Our attitude to the freedom struggle of the Tuareg people in Mali”, by Johannes Wiener; in: Revolutionary Communism No. 3, June 2012, www.thecommunists.net/worldwide/africa/mali-free-azawad/

 

[31] International Federation of Human Rights (FIDH): Exiles From Libya Flee To Egypt (2011), p. 4

 

[32] Immigrants of Libya, China.org.cn, March 23, 2011 http://www.china.org.cn/world/2011-03/23/content_22202161.htm

 

[33] Mass refugee exodus in Libya, 22 January 2008, http://www.amnesty.org.au/refugees/comments/8335/